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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OO 할아버지. 수술을 잘 마치고 수술 상처도 잘 나아서 퇴원 이야기를 할 무렵 경련을 시작하셨다. 처음에 한두 번 했을 때 신경과 컨설트 내고 약을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경련을 반복했다. 마침 학교 선배가 신경과 2년차여서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도 하며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변화가 없었다. 컨설트 답변대로 처방해도 수시로 경련을 했고 그래서 다시 낸 컨설트에는 약제의 용량을 올리라는 답만 달릴 뿐이었다. 경련을 심하게 해서 식이를 못하고 라인을 잡아야 할 때 잠시 발프로에이트로 변경했는데 그때는 경련을 안 했다. 그래서 이 약제로 변경하는 게 어떤지 물어봤는데 신경과 선배는 컨설트 답대로 1차 약제인 레베티라세탐을 유지하고 안 되면 용량을 계속 올리는 게 좋다고 답했다.

 

하지만 경련의 주기가 점차 짧아졌다. 5월 들어와서 벌써 경련 회수가 14번이 넘었다. 이 정도면 뇌가 불타버릴 정도이다. 담당 교수님은 회진 때마다 한숨만 푹 쉬면서 신경과에 다시 물어보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구구절절 적은 컨설트에 신경과는 같은 답만 달아줬다. 참다못해 다시 그 선배에게 연락해서 물었다. “선배님. 혹시 그 환자 과장님이 보셨어요?” 뭐라고 둘러대는데 환자를 안 보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물었다. “혹시 과장님이 이 환자 알고 계신가요?” 또다시 뭐라고 둘러대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차 싶었다. 이 선배가 과장님께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자기 선에서 컨설트 답을 써서 보낸 거 같았다.

 

할아버지는 상태가 급격이 악화되어 이틀 전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경련을 하며 음식물이 역류해서 양측 폐야에 흡인성 폐렴이 심해졌고 왼쪽 가슴에는 흉수가 많이 차서 호흡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얼굴은 퉁퉁 부어있고 의식은 계속 쳐지고 바이탈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경과의 컨설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신경과 자료들을 찾아보고 발프로에이트로 약제를 변경했다. 다행히도 그 뒤로 경련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컨설트 냈으니 내가 할 건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 걸, 좀 더 주도적으로 물어보고 찾아보고 약을 변경했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무책임한 동료와 그 동료와 다를 바 없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무거운 자책감이 몰려왔다.

 

내가 담당하는 환자는 그 환자의 문제가 외과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내 환자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과에 컨설트를 쓰고 답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다. 내가 주치의기 때문에 어찌 됐든 내가 책임지고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내 영역이 아니다’ ‘컨설트 냈다’라는 면죄부 뒤에 숨어서 너무 안일하고 무책임하게 환자를 본 것 아닌지. 내가 하는 이 반성이 한 사람의 목숨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할아버지에게 너무 죄송하다...

2017.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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