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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가 없을 것처럼 열심히 달리다 며칠 전부터 뛰지를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체력관리를 못해서 그런 것 같다. 환자도 갑자기 30명 정도로 많아지고(누군가는 그 정도면 꿀 빨고 있다고 그러겠지만). 잠시 멈춰 넋을 놓고 있으니 모래알을 손에 쥐는 것처럼, 환자들이 내 손에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별생각 없이 잘 해오던 일들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지고 풀지 못한 스트레스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울리는 콜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행히 그럴 때 효과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밤늦게 혼자 회진을 도는 것이다. 전에 어떤 선생님께서 알려 주셨던 방법인데 효과가 있었다.

 

라운딩 시트 한 장 들고 그냥 가볍게 환자들 얼굴 보겠다는 마음으로 돌아다닌다. 지금 불편한 건 없는지 하루 동안 주치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없었는지 들어주고, 기회가 되면 드립 쳐서 웃겨 드리고 나도 같이 웃고, 가볍게 스킨십도 하면서 "잘 회복되고 있어요. 지금 제 환자들 중에서 제일 회복이 빠른 거 같아요. 더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하얀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

 

그렇게 환자들을 쭉 보고 나면 다시 일할 마음이 생긴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환자들이 다시 손에 잡히는 것 같고, 다시 오더와 차트를 보면 바꾸고 추가해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당직 때 콜을 많이 받는데 대부분의 노티는 통화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굳이 환자를 보러 가지 않아도 된다.

 

“오늘 수술한 환자인데 열이 나요. 환자분 힘들어하거나 다른 증상이 있지는 않으시구요.”

“네 그럼 lung care(심호흡시키는 것) 하면서 경과 관찰할게요. 2시간 뒤에 v/s 해서 문자 주세요.”

 

뭐 이렇게 하면 끝난다. 그런데 환자가 힘들어하면 잠깐 얼굴이라도 비춰야 하지 않나 싶어 얼마 전부터는 어지간하면 어떤 콜이든 가서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얼마 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수술하고 병동에 올라온 환자가 열이 난다는 노티가 왔었다. 원래 수술하고 하루 이틀은 아무리 열이 나도 일단 기다려 보는 것이 답이고 딱히 해줄 것이 없다. 그래도 결심한 대로 한번 가봤다.

 

아주머니는 열이 펄펄 끓어서 그리고 수술부위 통증 때문에 힘들어하고 계셨다. 이마에 손을 대서 열도 느껴보고 청진도 해보고 JP 양과 색깔도 확인하고. 그렇게 간단히 환자를 봤다. 그리고 수술이 끝나고는 이렇게 열이 날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고 통증이 있으면 무통주사 버튼 누르고 그걸로 안 되면 다른 약으로 조절해 드리겠다고 설명드렸다. 그러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선생님 나 죽는 거 아니겠죠? 너무 무서워요.."

 

이 말을 듣는데 깜짝 놀랐다. 워낙 크고 험한 수술들을 많이 봐서인지 장 자르고 붙이는 정도야 간단한 수술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환자가 지금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었다. 내게는 별것 아닌 수술이 환자에게는 죽음의 공포까지 불러일으키는 큰 수술일 수 있겠구나. 이 야심한 밤에 배는 너무 아프고 열을 펄펄 끓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니 나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내가 의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그런 생각 안 했을까. 그런 상황에서 의사가 와서 봐주지 않으면 얼마나 더 걱정될까.

 

병실 문을 나가다 다시 돌아와 아주머니 손을 토닥이며 말씀드렸다.

 

"에이 무슨 소리 하세요. 하루 이틀 힘드시겠지만 금방 회복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수술하신다고 고생하셨고 이제 맘 놓으세요"

 

이 말을 듣고 아주머니는 감사하다며 긴장을 좀 놓으시는 것 같았다.

 

당직실로 돌아오는 길. 솔직히 1년차 2개월도 안 한 내가 뭘 알고 뭘 할 줄 알겠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야심한 밤에 콜을 받고 졸음과 싸우고 병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아파하는 환자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걱정과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것. 어쩌면 그건 다른 걸 할 줄 모르는 초짜인 나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의사가 넘쳐나는 이 큰 병원에서, 이 야심한 밤에 혼자 아프고 두려워하는 환자에게 “괜찮아요. 그리고 더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 말을 건넬 수 있는 의사가 몇 없다고 생각하니 하찮게만 보였던 저년차 밤 당직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착각일 수 있지만 착각이면 어떠랴. 이런 착각에 당직의 피곤함이 좀 가시는 것 같다.

 

 

201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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