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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청년한동? #12 정규성] (2016.06.15)

 

이름: 정규성

한동 학번: 생명상담 04학번

현재 하는 일: 서울아산병원 인턴

사는 곳: 서울

미/기혼: 미혼

 

안녕하세요. 이곳에 공지나 사진만 올리다가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올리려니 좀 쑥스럽고 그렇군요. 어느덧 인턴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났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편했고, 생각했던 것 보다는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3월에는 NS에서 열심히 수술방을 뛰어다녔고, 4-5월은 강릉아산 NR ER을 돌면서 노련한 의사인 척 하는 연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지금은 PLM 단기병동에서 lung cancer evaluation 하는 환자들의 주치의를 하면서 정말 내과 선생님들 대단하구 하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지금 PLM 파트에 믿음직한 R2 이세희 선생님이 계시지요.

 

사실 지난주가 휴가여서 오사카-교토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제 지난 삶을 돌아봤는데 참 irregularly regular 했던 삶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제 삶에 무작위로 주어지는 것 같았던 일들이 지나와서 보니 두 가지 큰 줄거리로 이어지는 느낌이랄까요.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알아가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 이야기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제 어릴 적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다 나눌수는 없고 생각나는 몇 가지만, 예전 글들을 복붙해서 나눠보려 합니다. 하나하나 쓰기에는 인턴의 삶이...

 

 

0) 한동대학교 졸업 이전의 이야기

 

한동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저는 자신 있게 “농아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학시절 수화동아리를 통해서 농아인들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그들의 언어인 수화와 그들의 삶에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외에는 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직접 경험한 농아인 사회는 단순히 신체적인 장애뿐만 아니라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또 다른 나라의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분들과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웃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단편적으로나마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입학 전 한동에서 의료선교사로 훈련받고 싶다고 기도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선교지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민들을 그때 많이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농아인들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만난 대부분의 농아인은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분들이었습니다.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사회적 편견만으로도 힘들 텐데, 통역사가 없으면 병원에 갈 수 없어 홀로 아팠고, 일터에서는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해 가난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의 의사소통도 그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보며 그 분들에게 작은 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아리 친구들과 농아인 자녀교육, 수화교육 및 통역, 독거노인 돕기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 또한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의 노력이나 보람과는 별개로 그들의 삶은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어 보였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기분이 들곤 했었습니다. 한 사람과 사회가 나의 생각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긴 무력감,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을 계속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죽어야겠다 결심했다가 매주 찾아오는 제가 생각나서 그 마음을 돌이켰다는 독거노인 아저씨, 자신들의 자녀를 가르쳐주어 너무 고맙다며 작은 것 하나라도 손에 쥐어 주시려는 아주머니, 그리고 수화통역을 하는 나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봐주시는 농아인 분들을 볼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무력감 때문에 남은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한 만큼 더 치열하고 깊게 고민에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또한 지금처럼 혼자 아등바등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신의 한계 속에서 ‘함께’라는 가치를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잘 몰랐지만 그런 배움이 졸업 후에 머시쉽과 청년한동의 가치를 보게 되는 밑바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이야기/농아인 & 수화] - 사랑,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2009.10.6)

 

 

1) 한동대학교 졸업 이후의 삶이 궁금합니다.

 

(1) 머시쉽

 

의전원에서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머시쉽”입니다. 본과 2학년 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학을 하고, 휴학한 김에 의료선교지에 가보고 싶어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머시쉽(Mercy Ships)에 갔다 왔습니다. 머시쉽은 1978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병원선을 이용하여 아프리카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제가 갔을 때 그 배에는 40개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곳은 또 하나의 작은 세계였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펼치는 다양한 생각, 생활방식, 전통, 문화, 가치관 등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한 주의 반을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환자 선별 작업을 하거나 현지병원, 교도소, 농아인 학교 같은 곳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저를 포함한 머시쉽의 봉사자들은 하나의 팀으로 움직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수술로 치료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현지의 보건의료 환경을 변화시키는 일에 현지인들을 최대한 참여시키고 그들의 역량을 향상시켜 그 변화가 지속 가능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런 노력이 쌓여 서아프리카 지역의 보건의료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머시쉽의 의료원장이자 30년 동안 그곳에서 헌신해온 게리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이렇게 한 사람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더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머시쉽의 많은 봉사자들을 보면서 저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머시쉽이 진행하는 다양한 의료 서비스와 지역개발사업들을 보면서 의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 기대가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주인공으로서의 의료인의 모습을 꿈꿨었다면, 머시쉽을 다녀온 후로 그 주인공인 의료인들이 각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분들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서로 협력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조연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ttp://drjeong.tistory.com/entry/머시쉽-이야기-아프리카-기니Guinea를-다녀와서

 

 

(2) 청년한동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 한국머시쉽에서 3개월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제게 주어진 일은 후원자 관리와 홈페이지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동출신 졸업생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한동에 대해 큰 애정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 일들을 계기로 한동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청년한동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게 되었고 그 가능성을 가슴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잔을 내게서 치우시기를 원했지만, 머시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CMS 후원을 받기 위해 갔었던 청년한동 모임에서 회장이 되어버려(?) 그 뒤로 3년간 청년한동을 짝사랑 했습니다. 청년한동을 시작할 당시 고민과 기대를 담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http://drjeong.tistory.com/entry/그-분이-다-하신다

http://drjeong.tistory.com/entry/응답하라-청년한동

 

 

2) 요즘, 삶에서 가장 관심 있는 화두는 무엇인가요?

 

종원 선배님과 민효의 관심 주제와 동일합니다. 

 

 

3) 마음에 품은 꿈과 비전이 있다면 나눠주시겠습니까?

 

예전에는 제 비전은 ‘무엇’이라고 망설이 없이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농아인을 비롯한 장애인들을 돕는 것,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소아외과를 전공하여 의료선교사가 되는 것 등등. 그런데 요즘에는 선뜻 그런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전보다 그런 삶에 대한 마음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얼마나 좁은 길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은 어떤 크고 멋진 일을 하기보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 작은 예수의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 스스로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어느새 욕심이 생기고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머시십도 청년한동도 소울도 어느 하나 거기서 자유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겪으면서 그저 제게 주어진 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삶 가운데서 제게 주어는 숙제들을 풀어내고, 믿음의 도약이 필요한 지점에서 용기 있게 점프해 보고, 그런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더욱 더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그 나머지는 인도하심에 따라.. 

 

 

4) ‘청년한동’에게 바라는 점이나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실 청년한동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다른 누군가보다 제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슬로건을 가슴에 품고 졸업했지만, 사회는 그리 만만치 않고 세상가치의 거센 흐름 속에 제 몸 하나 추스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신앙과 제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했고 저는 그 공동체가 청년한동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내가 쓰러질 때 날 잡아줄 수 있는 공동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에 대해 마음껏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선한 일들을 함께 꿈꾸고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원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이미 청년한동이 제게 그런 공동체가 되어 있었고, 누군가에게 그런 공동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깊이 기쁘고 감사함을 느낍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달란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고집과 믿음을 주신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가는 고집, ‘죽으면 죽지 뭐’하는 쿨한 믿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런 제 달란트를 청년한동을 다시 살리는데 쓰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년한동은 이제 저와는 다른,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달란트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수련과정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제가 상상치도 못했던, 또 다른 모습의 멋진 청년한동이 저를 꽉 안아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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