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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실 이전에 참가했던 공모전에서 했던 이야기들과 사회봉사 일지의 일부분을 짜집기 한 것이다. 아버지가 이 글을 보시고 수정해 주시면서 "문체는 그저 그렇지만 글에서 진실성이 느껴졌다"고 하셨다. 진실성이라.. 더 진실되게 썼으면 이 글은 체험수기가 아니라 반성문이 되지 않았을까? 글을 최대한 미화하지 않고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큼 농아인들을 진실되게 대했느냐 하는 물음에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나누는건 내가 받은 이 선물을 나눔으로써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그분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 중에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이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대학 생활 4년 동안에 이 말의 의미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들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청각장애를 가진 독거노인 몇 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후두암에 걸려서 수술을 하셨다가 그 후유증으로 신경 마비증상을 겪고 계신 박ㅇㅇ 아저씨이다. 처음 그 집에 찾아가서 그분의 모습을 봤을 때 정말 끔찍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과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침, 그리고 바짝 여윈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난 할 말을 잃었다. 신경 마비로 인해 말씀을 하실 수 없어서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고, 지금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교회에 다니는데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 주세요.”라며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아저씨와 나와의 첫 만남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고, 너무 힘들어하셔서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고민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찾아가서 집안 청소와 안마를 해드리고 스케치북에 글로 쓰면서(필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시던 아저씨께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마음을 여셨고, 나중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참 많이 하셨다. 예전에 리비아에서 일하셨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시며, 그 시절을 떠올리는 아저씨의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고, 떠난 아내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눈물을 보이기도 하셨다. 나중에는 아저씨가 글씨를 다 쓰시기도 전에 어떤 말씀을 하실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해졌다. 사실 학기 중에 시간을 내서 아저씨를 방문하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 그 시간을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고 계시다는 보람 반 부담감 반으로 그 자리를 기쁨으로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아저씨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는 게 너무 괴로워서 며칠 전에 떨어져 죽으려고 계단 위에 서 있었는데, 네 생각나서 차마 못 죽겠더라.” 종이에 한자 한자 새겨지는 그 글씨를 보면서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부족하기만 한 정성이었고, 보잘 것 없는 사랑이었는데, 그게 아저씨를 살렸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했다. 얼마나 주변에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나와의 그 짧은 만남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으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졌다. 시간이 좀 흘렀지만 그때 받은 그 충격이 아직도 내 마음에 생생하다.

 

또 다른 독거노인 한 분이 생각난다. 그 분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인이셨다. 차가 없으면 찾아가기 힘든 상당히 외딴 곳에 살고 계셨다. 그 곳도 박00 아저씨의 상황보다 나을게 없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어보니 어두컴컴한 방에는 온통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썩은 음식 냄새가 진동했으며, 김00 할아버지는 그곳에 죽은 듯이 누워계셨다. 그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을 시작으로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오랜 시간 계속 되었다. 찾아갈 때마다 방안의 거미줄을 치우고 썩은 밥으로 가득했던 그 밥통을 씻어 새 밥을 해 드렸다. 밥만 해놓고 가기 죄송해 반찬을 사와 함께 밥도 먹고 식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손발톱을 깎아 드리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집을 나서면 환하게 웃으시며 수화로 뭐라고 말씀하시고는 꼭 앞마당의 커다란 감이나 호박을 쥐어주셨다. 난 그 웃음이 참 좋았다. 

 

그러다 방학을 맞이해서 집에 몇 달 동안 있다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보니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앞마당에 화초들과 여러 가지 채소들이 있어서 다른 누군가가 함께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것들을 키울 힘이 없으시니까... 방문을 열어보니 다시 거미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방이 하얀 벽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이불과 식기도구들은 모두 다 잘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가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구나” 하며 생각하고 있을 때 쯤 옆집 아주머니께서 오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6월인가 7월인가 2주정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고, 지금 그 집에는 며느리가 살고 있다고 하셨다. 

 

그때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의 삶을 누가 기억해줄까? 돌아가시기 전 2주 동안 아파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왜 그분은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셔야 했던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죽고 싶은데 못 죽어서 산다는 박00 아저씨와 썩은 밥 드시다 기억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돌아가신 김00 할아버지... 그분들의 삶이 너무 가난하고 슬퍼서 울었고, 배부른 내 삶이 송구스럽고 죄송해서 울었다. 

 

이 두 분의 농아인 독거노인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또 잊을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은 농아인 협회를 통해 알게 된 농아인의 자녀들이다. 대부분의 농아인 자녀들은 부모와 대화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자라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 발달이 늦다. 그뿐만 아니라 농아인 부모들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무력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농아인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학업과 인간관계를 포함한 사회화 과정에서 조금씩 뒤쳐지게 되고,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는 것 같다. 

 

나는 농아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런 문제들을 자주 봐왔기 때문에 그 부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때마침 이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그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한번 정도 공부를 가르쳐 주기로 하고, 그 날 이후로 동아리 후배와 함께 지속적으로 그 아이들을 만났다. 정완이 정대가 농아인 자녀로서 가질 수 있는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주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특했는지... 요즘 들어 단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부모님과 아이들 사이에 대화가 많이 없다는 것이다. 정완이 정대가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수화는 알고 있지만,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만큼 수화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농아인 자녀가 가지는 또 다른 어려움인 것 같다. 농아인 자녀라 언어 발달이 느린 것도 문제이지만, 그 뒤쳐짐을 만회하기 위해 언어 교육에 집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수화 교육의 중요성이 등한시 되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농아인 자녀들과 부모와의 대화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게 되고, 자녀들의 인간관계가 넓어짐에 따라 그 둘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기도 한다. 내가 졸업반이 되면서 이제는 다른 후배들이 정완이 정대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이 아이들을 향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이야기들도 많이 생각난다. 여기에 다 나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농아인들에게서 수화를 잘한다고 칭찬을 들어 어깨가 으쓱했던 날, 친했던 농아인 아주머니가 자살을 하셔서 하염없이 울었던 날, 사회봉사 오가는 길에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이거 웬 사서 고생인가 하며 짜증냈던 날, 농아인 목수 아저씨한테서 책상을 선물 받았던 날, 처음으로 수화통역을 하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던 날, 등등. 그들과 함께 했던 하루하루가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양파 껍질처럼 문제 뒤에 또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는 농아인들의 삶... 이분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어려움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거미줄이 쳐진 방에서 썩은 밥을 먹는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더더구나 없었다. 부모님과 일차적인 의사소통이 안 돼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화목한 가정, 사랑하는 친구들, 건강한 몸과 나쁘지 않은 머리, 거기다 훗날 의사가 되어서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이상적인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던 나는 한마디로 ‘부유한’ 청년이었다.

 

이런 내게 농아인들과의 만남은 내 안주함을 흔드는 큰 사건이자 축복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서 나누는 삶으로의 초대였고, 그분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내가 가진 부유함을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지에 대한 소리 없는 도전이었다. 또한 사랑과 섬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생각들을 깨트려버리고, 참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 참사랑이 사람을 살게끔 한다는 사실도 경험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시간이 모두 아름답고 즐겁기만 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일 것이다. 그런 배움이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았고, 떠나고 싶을 때도 참 많이 있었다. 이제 졸업할 때가 되었으니 공부에만 전념하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의사가 되면, 이들을 돕겠다는 면죄부를 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지금도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시는 박00 아저씨, 보고 싶은 김00 할아버지, 씩씩하게 잘 크고 있는 정완이 정대와 그들의 부모님들, 또 만날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농아인분들이 내게 용기를 줬다. 

 

참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지만, 희생이 따르는 사랑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꾼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이들을 섬길 것이다. 이제 곧 졸업해서 정들었던 포항 땅을 떠나겠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경험한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 것이다. 부족하지만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면서 배울 것이다. 사랑하면서 더 깨어지고 다듬어질 것이다. 

 

처음에 소개한 박00 아저씨는 요즘 요양병원에 계신다. 내가 갈 때 마다 눈을 크게 떠 반가움을 표시하시는 아저씨... 아저씨께서는 최근에 다른 환자들의 병수발을 도와주실 정도로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다.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불편하실텐데, 다른 환자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팬을 힘겹게 잡고 한자 한자 써 내려가는 아저씨이지만, 이제는 동정심이 아니라 감사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아저씨와의 만남을 통해서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는 평생을 잊지 못할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람을 살리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 사람도 살리는 것이다. 이것이 참 사랑인 것 같다. “애지욕기생” 이 말 한 마디를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던 지난 경험들은 내 인생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지고 귀중한 보물인 것이다.

 

2009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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