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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에 전역을 하고 나니 할 일이 산더미 같다. 이상적인 뭔가를 좇기에는 부닥치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기만 했다. 내 앞에는 남은 대학 생활 동안 껴안고 살아야 할 전공서적들이 쌓여 있었고, 주위를 돌아보면 3, 4학년이 되어 삶의 잔가지들을 치고 열심히 뛰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농아인과 그들이 출석하는 교회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일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과감히 정리해야 하는 잔가지들이 아닐까? 한 손에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다른 한 손에는 ‘현실적’이라는 면죄부를 들고 서 있는 내 모습에 답답하기만 했다.

이런 갈등 중에 있는 나를 농아인들과 함께 캄보디아로 보내신 하나님. 단기선교를 떠나는데 참 마음이 뒤숭숭했다. 나는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엉킨 실타래를 한 아름 안고 이것이 풀리기를 기도하며 포항 땅을 떠났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혜를 베푸셨다. 베푸셨다는 표현보다 쏟아 부어주셨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밀물처럼 잔잔히 그러나 쉬지 않고 밀려드는 깨달음과 은혜 때문에 사역기간 동안 많이 울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주님의 음성 때문에 계속해서 목이 잠겨왔다. 캄보디아와 농아인들을 변화시키시길 원하시는 주님은 먼저 나를 변화시키시길 원하셨던 것 같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29)

사실 나는 농아부 단기선교에 회의적이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분들이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역기간동안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이 교만과 불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 그리고 그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얼마나 겸손하게 무릎 꿇느냐에 달려있다.' 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또 스스로 했었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런 믿음보다 인간적인 계산을 더 앞세우는 나 자신을 보면서 회개하게 되었다.


#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1-5)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만을 사모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농아인들이 가진 장애와 어려움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농아인들은 건청인들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렵게 살아간다.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는 아픔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이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축복으로 바꾸시고, 그것들을 당신의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처럼, 인간적으로는 가진 것이 없기에 주님을 더욱 더 의지하는 농아인들을 그분은 더 크게 사용하실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의 인생에 깊은 아픔이 있기에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강점이 이들에게 분명히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다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비천한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의 장애만 바라보고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기 이전에 그 너머에 있는 강점들과 가능성을 바라보아야 한다. 장애인을 단지 복음전도와 자선의 대상, 또는 이런 활동들의 수동적인 참여자로 여기는 지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효과적인 복음전도자가 될 잠재력을 가진 이들에게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많은 기회를 주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 준다면 이들도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장애인들의 활발한 선교 활동과 그 열매들은 인간의 말과 지혜로 나아가는 우리를 주님 앞에서 다시금 겸손케 만드는 안전핀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3.

내가 이런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역기간 동안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농아인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의 아픔을 회복시키시고, 그 흉터까지 귀한 일에 사용하시는 주님을 다시 한 번 찬양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담은 무언극과 수화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현지인들에게 도전을 주는 모습,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열심으로 교회 보수공사를 하던 모습, 캄보디아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자신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는 모습. 그 모습들 속에서 약한 자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고, 스스로 지혜 있다 여겼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7)

캄보디아에 있는 동안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믿는 사람 각자의 고아와 과부가 다를 수는 있다. 돌봄의 대상과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웃 섬김과 복음전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감당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인 것이다. 지기 꺼려지는 십자가지만 예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져야 한다는 것. 여기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내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준다는 곳. 그리고 이 일은 결국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라 고백하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4.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나에게 있어서 고아와 과부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다다랐을 때 캄보디아의 사람들과 농아인들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고, 또 한 번 눈물이 터졌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농아인의 3퍼센트만이 기독교인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선교하러 갔던 캄보디아인의 1퍼센트 미만이 기독교인이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복음 또한 듣지 못하고 바르게 배우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서 고아와 과부로 취급당하는 그들은 가장 중요한 영적인 기본권마저 가지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전파의 우선 대상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캄보디아 사람들과 농아인들의 아픔을 보면서도 ‘이상적’이라는 말 한마디로 외면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더 굳건히 세우는 일을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척하면서, 나의 이력에 별 도움이 안 되지만 그래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등진다면, 훗날 나는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과연 크리스천에게 ‘현실적’이라는 면죄부가 주어졌을까?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는 동안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실타래가 어느새 풀려져 가고 있었다.


#5.

주님은 오늘도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당신을 따르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실지 모른다.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과 내 이웃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늘 겸손히 기도의 무릎 꿇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을 말이다. 캄보디아 땅에, 농아인 공동체에, 한국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속한 일터에서 그런 헌신된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길 기도한다. 또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가운데서 빛 같이 나타나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기를 소망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2:13-16)


2008.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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