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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이와 정성이와 함께 트럭을 타고 구룡포 할아버지댁으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 뵌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다. 가는 길에 GS마트에 들려서 평소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깻잎과 물김치와 요구르트를 사고 반찬을 담을 수 있는 압축 용기 2개를 샀다. 이것 저것 더 사가고 싶었지만 반찬값이 생각보다 비싸서 일단 오늘은 거기서 참았다. 마트에서 출발한지 30분 좀 지나니 공당 마을이 나왔다. 

할아버지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앞 마당에 화초들과 여러가지 채소들이 있어서 다른 누군가가 함께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런 것들을 키울 힘이 없으시니까... 방문을 열어보니 그 거미줄 쳐있고 더러웠던 방이 하얀 벽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불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이곳 저곳에 굴러 다니던 쌀포대와 라면들 그리고 식기도구들은 다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누군가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구나 하며 생각하고 있을 때 쯤 옆집 아주머니께서 오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6월인가 7월인가 2주정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 그 집에는 그 며느리가 살고 있다고 하셨다. 그때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한참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괴로운 마음을 보이기 싫어서 아주머니께 이것저것 질문하고 이런 저런 말들을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 학기에는 할아버지께 해드리고 싶은것이 많았다. 같이 목욕탕도 가고 싶었고 바다도 보여드리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할아버지를 꼭 전도하고 싶었다. 하나님이 얼마나 할아버지를 사랑하시는지 말해드리고 싶었다. 글도 못 읽으시고 귀도 안들리시고 수화도 모르시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생각날 때 마다 기도해 왔었는데...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의 삶을 누가 기억해줄까. 그 영혼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한번이라도 들어 보셨을까. 돌아가시기전 2주 동안 아파 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왜 할아버지 밥 걱정은 많이 했으면서 영혼에 대해서는 무감각했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혼란스럽다. 믿으면 천국 안믿으면 끝장이라는 기독교의 간단 명료한 교리가 정말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몇 달 전 제주도에 수련회에서 알게 된 농아인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한라산 등반을 할 때 유독 힘들어 하시길래 부축해 드렸고, 결국 함께 등반을 잘 마쳤다. 그 뒤로 그 아주머니는 날 볼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2주 전에 자살을 하셨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가 되셨다. 이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죽고 싶은데 못죽어서 산다는 창포동 아저씨, 매일 같이 썩은 밥 드시다 기억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돌아가신 구룡포 할아버지,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지옥이다. 거기에 비해 지금의 내 삶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너무 많은 복을 받아서 뭘 받은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내게 세상의 어두운 면들을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인지 알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현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예배 시간 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 제발 나의 젊음을 썩어 없어질 것들에 쓰게 하지 마시고, 당신의 사랑을 전하는 곳에 쓰게 해 주세요.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내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내 가슴을 찢어 놓아도, 그것 때문에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그 안에서 당신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하나님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은 신실하시고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희 동아리 그리고 저희가 섬기는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 기억하여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정말 당신이 필요합니다.

2005.09.10  
독거노인 사회봉사 일지
 


 

일지 정리하다가 다시 보게 되었는데 또 눈물이 난다.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내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2005.12.05
총회를 마치고
소울에서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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