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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School for the deaf에 갔다. 코나크리에 있는 농아인 학교다. 그 전에도 몇 번 가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프로그램이 취소가 돼서 못 가다가 오늘에서야 가게 됐다. 대학시절 내내 농아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어 그 어느 사역보다 기대가 컸다.

농아인 학교에 들어가니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손짓과 표정들이 보였다. 규모가 작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본 학생들만 70~80명은 족히 넘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저학년인 아이들을 상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스티커 붙이기, 색칠하기 같은 소소한 놀이었다.

악수로 서로 간단히 인사를 하고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수화를 써 봤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수화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의사 소통하는 것이 어렵지가 않았다. 아마 수화의 어원의 상당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바디랭귀지이기 때문인 것 같다.

거기에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는데 다 농아인이셔서 머시팀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내가 머시팀과 농아인 선생님 및 아이들 사이에서 수화 통역을 하게 되었다. 간단한 지시사항 같은 것들을 수화, 아니 수화라기 보다는 마임에 가까운 몸짓으로 알려주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팀에게 알려 주었다. 불어도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프랑스 수화를 쓰는 사람들과 영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역을 한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저학년 아이들이 색칠놀이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교과서를 가지고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책을 펼쳐서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런 저런 수화들을 배웠다. 동물에 관한 수화는 우리 나라와 거의 비슷했다. “원하다” “놀라다” 같은 감정표현 수화들도 상당부분 비슷했다.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내게 “의자” 수화를 계속 했다. 알고 보니 여기서는 그 수화의 의미가 “이름”이었다. 문득 오래 전 포항의 농아인들이 내 이름을 지어줬던 기억이 났다.

1년 동안 성실히 농아인 교회를 출석하자 그곳 농아인들이 내게 수화이름을 만들어줬다. 내가 드디어 그 커뮤니티에 받아들여졌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행복했었던 그 날이었다. 그때 지어준 이름이 “야곱+남자”이다. 입술 가운데 작은 점이 있어서 그걸 표현하다 보니 야곱이 되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그 수화의 다른 의미는 “끈기, 고집”이다. 그래서 내 수화 이름의 의미는 결국 “고집스러운 남자”가 되었는데 뭐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계속 쓰고 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는 머시팀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름을 지어줬다. 이들도 내가 전에 만났던 농아인들처럼 사람의 특징을 잘 잡아내서 재미있는 수화이름을 지어주었다. 머시팀 사람들은 그 아이들이 이름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말 신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는 나를 신기해했다.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냐고 여러 번 되물었다. "When I was a college student, I had attended a deaf church for five years."라고 대답하는데 어깨까 으쓱해졌다.

한동을 졸업하고 내가 농아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었다. 감사함도 있었지만 후회도 분명 있었다.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수화하는 시간에, 동아리 활동한 시간에 영어공부, 해외여행, 스팩이 될 만한 경험 같은 것들을 했다면 지금 내 모습을 어땠을까? 좋은 추억이 남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수화 배운 것이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때 왜 그렇게 열심히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후회 아닌 후회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농아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단순히 내게 수화실력과 좋은 추억만 남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수화 이상의 것, 단순히 “수화”라는 한 언어가 아니라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연습, 눈 높이가 낮은 사람들을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훈련, 상대방이 누구냐에 관계 없이 하나님 안에서 같은 형제 자매로 여기고 동등한 위치에 서려는 태도..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많이 성장했다. 수없이 무너지고 깨어지고 다듬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들이 나도 모르게 귀한 태도들을 마음에 새기고 몸에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 기회들이 예수님을 더욱 더 알고 이해하게끔 도와주기에 또 감사했다. 그분이야 말로 모든 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시고 소통하셨던 분이다. 고아든 과부든, 부자든 거지든, 어부든 목수든, 테러리스트든 창녀든, 앉은뱅이든 문둥병자든.. 예수님께서는 가리지 않으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목사든 성도든, 농아인이든 건청인이든, Crew member든 Day worker든, 의사든 막노동꾼이든, 크리스천이든 무슬림이든, 동성연애자든 에이즈환자든.. 예수님은 가리지 않고 소통하셨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싶다. 그런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다. 그 어떤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농아인들과 소울과 함께 했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란다. 아니 늘 감사히 여기련다!

201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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