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쉼표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제 지난 삶을 돌아보면 늘 하고 싶은 선택을 접어두고 해야 하는 선택을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2월 말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하늘 나라에 보내드린 후 이런 제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치열한 본과 2학년의 레이스를 하고 있을 때였지만 ‘여기서 한 번 쉼표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지지가 않더군요.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보따리를 쌌습니다. 저희 부모님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반대했지만 돌아보면 참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제가 아프리카에 간다고 하니 친구들이 저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쳐다 보곤 했습니다. 뭔가 거창한 ‘비전’을 품고 떠나는 ‘열정’적인 청년처럼 보였던 걸까요? 좀 쑥스러웠습니다. 물론 오래 전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Mercy Ships이라는 병원선 이야기를 듣고 언젠간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휴학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왜 휴학하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가장 그럴듯한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렇게 어설프디 어설프게 시작되었죠.

 

지원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자기소개서, 목회자와 교수님 그리고 친구들의 추천서, 건강검진서, 그리고 다른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서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습니다. 지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제정적인 부분과 영어였습니다. 저는 5월부터 8월까지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면서 경비를 마련했는데 정말 돈 벌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주로 아버지와 싱크대를 철거하러 다녔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집이 걸리는 날에는 정말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일용직 노동자의 삶이 익숙해질 때쯤 저는 서아프리카 기니에 정박해 있는 병원선을 향해 떠났습니다.

 

 

서아프리카 기니

여러 사람들이 제가 그곳에서 의료관련 일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일을 했습니다. 군대 취사병과 하는 일이 거의 똑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아침 8시부터 저녁7시까지 계속되는 중노동이 너무 힘들었는데 시간 지나니 익숙해 지더군요. 나중에는 힘들면 티 안 나게 요령도 부리고 함께 일하는 아프리카 친구들과 노래 부르고 춤도 추면서 즐겁게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늘 음악과 춤과 웃음이 있었어요. 음악이 나오면 저는 아프리카 전통 춤을 추고 이 친구들은 강남 스타일을 추곤 했습니다. 그런 흥겨움이 아프리카 사람들 살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저는 그게 참 좋았습니다.

 

이틀 일한 뒤에 주어지는 이틀간의 휴식 시간에는 다양한 활동들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명색이 의대생인데 병원에서 일 좀 하게 해주지 하는 생각에 입이 삐죽 나왔었는데, 금방 마음 고쳐먹고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감사함으로 참여했습니다. 저는 주로 환자 선별 작업을 하거나 현지병원, 교도소, 농아인 학교 같은 곳을 방문해서 도와주었는데 그곳에서 진행되는 하나 하나의 프로그램들이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좀 지루할 때는 친구들과 갑판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노을과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기도 하고 현지 청년들과 축구도 종종 했었지요. 한국에서는 공 꽤나 찬다고 생각했는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타고난 운동신경을 지닌 흑형들과 공을 차니까 내가 언제 축구를 잘 했나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세계

 

Mercy Ships에는 40개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곳은 또 하나의 세계였었죠.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너무나 다양한 생각, 생활방식, 전통, 문화, 가치관 등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있으니 세상이 참 넓다는 것과 지금까지 너무나 좁은 나만의 기준, 한국인의 기준 안에 갇혀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지식, 능력, 타이틀, 건강 등은 내가 어디 있느냐와 내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감사가 될 수도 있고 열등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기니 사람들에겐 제가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약도 없고 할 수 있는 수술도 별로 없으니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이 나라에서 가지는 역할이 크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여기서는 축구를 잘해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절대적이지 않은 성공의 기준들, 사회적인 가치들에 내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살아왔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딜 가도 변하지 않는 것 한 가지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이냐?’하는 부분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예수

제가 가진 이런 생각은 Dr. Gary를 만나면서 더 커졌습니다. 이 분은 Mercy Ships에서 25년간 일해온 헌신적인 의사로 ‘아프리카의 예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곳을 떠나기 며칠 전 수술을 참관하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막 구개열 수술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수술은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보고 있는 제 가슴이 정말 뜨거워졌습니다. 작은 아기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기도하는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 아이를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끝나자 조금 전까지 어수선하고 어설퍼 보였던 수술실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수술장면은 정말 신기했습니다. 아기는 오른쪽 입술이 갈라져 있고 오른쪽 코가 푹 꺼져 있었는데, 한 시간쯤 지나자 입술도 코도 예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마치 퍼즐이 다시 맞춰 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술 장면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동료를 대하는 Gary 선생님의 태도였습니다. 수술 방에서 의사들은 조금 거칠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선생님은 정말 여유 있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셨습니다. 그저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하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제게는 놀랍게 다가오더군요. 그리고 수술을 마칠 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은 정말 겸손하고 온유하시구나'

 

Gary 선생님께서는 수술이 끝나고 마스크를 벗으시고는 절 보면서 환하게 웃어주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한국에서 온 것과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을 아시곤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의사들이 너무나 필요한데 특별히 소아과, 소아외과, 성형외과 같은 분야의 전문의가 되면 이곳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어디 안가고 늘 여기 있으니까 내가 의사가 되어서 와도 또 볼 수 있을 거라며 웃으셨던 선생님... 그 웃음을 보면서 왜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분을 '아프리카의 예수'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 롤모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돌아보며

 

저는 아프리카에 가기 전 이런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곳에서 뭔가 내 인생을 바꿀만한 큰 일들을 경험하고 오지 않을까?’하구요. 그런데 그런 제 기대와는 다르게 작은 일상들… 아프리카의 잔잔한 저녁 노을,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서 드렸던 짧은 기도, 환자 선별작업에서 만난 한 아버지의 눈물, 병실에서 본 아이들의 미소, 설거지 하면서 불렀던 콧노래… 이런 작은 것들이 제게 변화와 회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인생에서 그 보다 더 ‘행복한 쉼표’는 없었을 것 같네요.

 

저는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와 시험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10년 뒤, 20년 뒤 가난하고 병든 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언고 기도하는 제 모습을 그려보면서 다시 시작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원합니다. 그때의 제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기를...

 

2013. 4. 30. 전북의전 소식지에 실은 글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