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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밤이 바뀌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다. 전문의 1차 시험이 끝나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금치 않은 결과다. 하고 싶은 잡다한 공부,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세상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다니.. 전공의 시절 '무욕' 상태를 경험해 봤으니 이런 일탈(?) 마저 반갑지만, 아직 2차 시험이 남았다는 걸 제발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어제는 오랜만에 세신을 받았다. 세신사 아저씨께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없어 힘들지는 않으세요?" 물었다가 세신하는 내내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있었던 궁금증 다 풀었다. 첫째는 당연히 월수입. 실례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는데 먼저 말씀해 주셨다. 올 한해 목욕탕 자리 월세와 차비로 월급 다 나가고 은행에서 빼서 쓴 돈만 몇 천만 원이라고 하셔서 깜짝 놀라며 걱정했더니 코로나 전에는 벌이 괜찮아서 돈 좀 모아두셨다고. 평균 000 정도 벌었다고 하셨다. 괜히 걱정했다. 내 세전 월급보다, 펠로우가 돼서 받을 월급보다 더 많이 버신다. 

 

둘째는 일이 힘드시진 않은지. 25년째 이 일을 해오셨고 하루 12시간 근무, 평균 30-40명 세신을 하신단다. 한창때는 70명씩, 명절 때처럼 사람들 밀려올 때는 100명까지 해보셨다고. 외래 100명을 간호사 도움받으며 3분 진료해도 교수님들 얼굴이 노랗게 뜨시는데.. 세신 100명이라.. 그 정도면 얼차려 수준 아닌가? 벌이는 다른 직장들에 비해 괜찮지만 맘고생 몸 고생 많으셨다 하셨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 외에도 보증금, 월세, 사업자등록과 관련된 문제 등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가 세신을 받으러 온 건지 코로나 영세민 현장 취재를 나온 건지 헷갈렸다.

 

오래간만에 깊은(?) 대화를 나누신 게 기분이 좋으셨는지 발 각질 제거는 서비스로 해주시고, 발이 갈라져서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비법을 알려주셨다. 

 

3.

 

오늘은 이발하러 갔다. 이발을 하고 와이프를 기다리던 중 평소 궁금한 걸 여쭤봤다. "입구에 '학사 출신' 광고가 보이던데 그게 뭐예요?" 그 후로 갑자기 이야기 봇물이 터졌다. 일은 엄청 어릴 때부터 했고 50세가 다 되어 뒤늦게 공부를 하셨단다. 자식 세명을 다 키우고 새로운 도전을 하셨던 거다. 교수님이 자신보다 어렸고, 기술적으로는 본인이 훨씬 나아서 실습 시간에 교수님과 같이 티칭도 하셨고, 자기 딸 같은 아이들과 함께 배우는 게 재밌으셨다고. "그럼 학사 출신이셔서 잘 하신 게 아니셨네요?" 하고 맞장구도 쳐 드리니 환하게 웃으시며 자식 이야기로 이어가셨다.   

 

딸은 SKY 국제외교학과 나와서 행정고시 한 번에 합격하고 5급 공무원. 사위는 법대 나와 사법고시 합격하고 지금 판사. 지난번 이발할 때 봤던 그 부부였다. 미용실에서 애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다가 내가 들어가니 자리를 피해주셨던, 일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게 많이 힘들고 지쳐 보였던 그 두 사람. '미용실 하는 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라서 사는 게 녹녹치 않은 맞벌이 부부'가 임프레션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아차 했다.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우리 부모님과 겹쳐져 마음을 담아 말씀드렸다. "참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자식 셋 잘 키우신다고 고생 많으셨네요" 

4. 

세신사 아저씨, 미용실 아주머니는 각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며 자기 삶의 앙꼬를 가진 분들이었다. 종종 마주했지만 그저 스쳐만 지나갔던 두 분과 짧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기뻤다. 각 사람마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게 다시금 놀랍다. 그 이야기를 끌어내어 들어주고 맞장구쳐주고 응원해 주는 삶도 참 괜찮을 것 같다. 

 

 

20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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