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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은 육체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특히 치매 dementia, 수막염 meningitis 등의 머리 쪽 문제는 피곤하면 짜증스러워지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인격을 드라마틱하게 바꾸기도 한다.

수막뇌염 meningoencephalitis 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채혈을 할 때마다 걸죽한 욕과 함께 소리를 지르고 호시탐탐 발차기를 날리곤 하셨다. 묘한 트집으로 사람 속을 뒤집기도 정말 잘해서

나와 간호사들을 어느새 파르르 떨게 만들었다.

어느 날 며느리가 면회 왔길래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어머니께서 평소에 성격이 좀... 그러셨나요?”

“전혀요. 어머니 같은 분이 없다 싶을 만큼 천사 같은 분이셨어요”

저 할머니가 천사였다고? 그럴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동안 본색을 안 드러 내셨던 게 아니셨을까 장난반 진담반으로 여쭤보니 지난 30년간 한결 같으셨다고. 자신도 저런 모습을 처음 본다고 그러셨다.

할머니의 수막뇌염은 강한 항생제 치료에도 불구하고 호전이 없었다. 열도 잘 안 떨어지고 피검사나 뇌척수액 검사 결과도 크게 좋아지지 않아 조바심이 나기 시작할 무렵 항생제 효과가 이제야 나오는 것인지 조금씩 fever peak가 떨어지고 염증 수치도 감소했다. 우유탄 물처럼 탁했던 뇌척수액도 이전보다 많이 맑아졌다. 교수님은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며 태연하게 이야기하셨지만, 이런 경험이 전무한 내게는 기적 같은 회복이었다.

그리고 그 욕쟁이 할머니는 갑자기 천사가 됐다. 내가 저 할머니한테 발길질을 당하고 욕을 먹었다는 것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온화하고 협조적인 따뜻한 할머니로. 그런데 참 신기한 건 나한테 욕하고 발차기했던 일들을 본인이 다 기억한다는 것.

어느 날 수줍게 웃으시며 그때 미안했다고,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싸우고 나면 친해지는 거처럼 선생님 보면 그렇게 반갑고 좋고 그렇다고 고백하셨다.

할머니 어차피 지금 정신도 없으시고 기억도 못하실 거라고 발차기 한 대 맞았고 쌍욕도 먹었다고 나도 같이 지랄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이 이야기를 할머니랑 며느리한테 하니 선생님 농담도 잘하신다고 웃으신다.

진심인데...

​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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