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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곳에 있는 의사가 바로 명의"라는 주연이의 말이 이해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간 곳은 재개발에 의해서 7천 명의 빈민들이 이주한 곳에 세워져 있는 빅토리아 교회였다. 여기서 이틀 동안 약 750명 정도를 진료했다. 나는 소아과 파트를 맡았는데 대부분이 감기나 편도선염, 농가진 등 진료하기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는 것이 없어서 무척 긴장을 했는데 물어 물어 진료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특별한 처방이나 처치가 아니라 걱정하는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 곧 괜찮아 질거라는 위로를 주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손가락 마디 마디마다 고름주머니가 생긴 아이, 항문이 막힌 채로 태어나서 복부에 대장을 연결해 놓은 아이, 눈이 감겨지지가 않는 아이, 긁어서 생긴 상처가 곪아서 발이 퉁퉁 부어 있었던 아이, 왼손은 손가락이 두 개고 오른손은 안으로 굽어버린 아이 등등.. 수업 때 그런 사진들은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날 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와 작은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그 아이의 어머니를 보고 있으니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했다. 그리고 돈 한 푼 없어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서 더 미안했다.

 

고름이 가득 차서 부풀어 오른 손, 그 반대편 손으로 캔디를 한 움큼 쥐고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돕고 싶고 어떤 역할을 가장 잘 해낼 수 있을까? 꾸준하지만 일회적인 이런 봉사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이 빈민가를 도울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는 것일까? 국내의 큰 교회들은 빈민가 한 지역을 충분히 변화시키고도 남을 인적, 재정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하게 이끌 수 있을까? 전주의 한 교회와 필리핀의 한 빈민가가 하나의 마을로 묶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기독교인의 부와 나눔은 어디까지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과 도전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평생 붙잡고 고민해야 할 것들인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가슴 깊이 느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드렸던 기도,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그 진심 어린 기도를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그 기도를 다시 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높은 것만 바라보다 하늘 보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니 땅의 것이 새롭다.

 

2012. 6. 15 / 필리핀 의료선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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