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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고난」 
「마태복음 13장 1절-9절」 

서론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3장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지금 말씀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듣고 마음에 깊이 새기라는 완곡한 권유입니다. 그 말씀이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농부들은 밀이나 보리를 파종할 때 하늘을 향해 씨를 뿌립니다. 대부분의 씨들이 밭에 뿌려지는데, 만약 그 순간에 바람이라도 불면 씨들은 길가나 돌밭 또는 가시떨기 위해 떨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길가, 돌밭, 혹은 가시떨기 위해 떨어진 씨들은 결실을 잘 못 맺고, 반면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만 100배 60배 30배 결실을 맺는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자나요 그죠? 좋은 땅에 떨어져야만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이 비유의 해석까지 친히 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농부는 주님이시고 씨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길가처럼 굳어 있거나 돌밭 혹은 가시떨기처럼 모가 나 있으면 말씀이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옥토와 같은 마음이라야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자나요 그죠? 이 이야기를 듣고 이야 또 그렇게 되네? 아니 그런 통찰력이... 이런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단 말이에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당연한 말씀을 하시면서 왜 굳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왜 그 비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걸까?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말씀 속에 정말 중요하고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씨가 뿌려진 장소 네 곳이 언급되어 있죠? 길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 이렇게 네 곳입니다. 그렇다면 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서는 제대로 결실이 되지 않을까? 왜 좋은 땅에서만 아름다운 결실이 가능한 것일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세 장소와 옥토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차이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길가, 돌밭, 가시 떨기는 본래 있던 모습 그대로 있는 땅이지만, 옥토는 일구어진 땅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 옥토란 갈아지고 흙이 뒤집어엎어진 땅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곡괭이, 삽, 호미, 쟁기 등이 그 땅을 깨고 부수고 갈아 엎는 과정을 거친 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땅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다 제거되고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옥토가 되는 거죠. 758형제들은 잘 알거에요. 네모반듯한 연병장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이 나랏이를 하고 돌을 걸러내고를 반복했는지.. 그렇게 노력이 들어간 땅이 바로 옥토입니다. 

그렇다면 옥토라 불리는 이 땅은, 땅의 입장에서 보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겪은 땅입니다. 곡괭이로 찍을 때 마다, 호미로 파헤칠 때 마다, 5돈 차량이 엄청난 무게의 빔을 달고 연병장을 달릴 때, 그 땅은 찢기고 으스러지고 가루가 되는 고난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거죠. 그리고 그 고난의 결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담아 들으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이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난을 외면한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뿐,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땅만이 결실을 맺는 좋은 땅이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삶의 열매로 결실 맺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마음이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으깨어져야 합니다. 쉽지 않은 시간이겠죠.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과 아픔이 있을겁니다. 그러나 그 아픔 없이는 절대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될 수 없고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도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고난이 결코 불필요하고 피해야 하는 고난이 아니라는 거죠. 그 고난은 확실한 결실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보증서이고 은혜이자 선물입니다. 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옥토로 일구어 주신다는데, 이 군 생활을 통해서  우리를 말씀의 결실을 맺게 하는 심령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데, 도대체 고난은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옥토로 바뀌는 것일까요? 

 


본론 

1.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죄의 현장에서 돌아서게 만드신다. 

1) 요나이야기 

여러분 요나 아시죠? 요나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 남유다 이렇게 남북으로 분열 되었을 때 활동하던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동북쪽으로 80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니느웨라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였고, 거기 사람들은 잔인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수의 살갗을 벗겨 성벽을 도배하고 그러는 사람들이었죠. 이런 도성에 가서 심판을 선포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고는 쉽지 않은 행동이자나요?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 지금으로 말하면 스페인 쪽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그가 탔던 배가 폭풍에 휩싸였고, 그는 그 폭풍 속으로 던져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순간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켜 버렸습니다. 요나는 4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의 순간이었죠.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서 요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바로 그 고난을 통해, 그 고난의 현장에서 요나는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 결과 왕에서부터 백성까지 모두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요나 선지자가 다시스에 갔다면 더 잘 먹고 잘 살았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이런 값진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를 덮쳤던 폭풍의 고난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었던 거죠. 

2) 탕자의 비유 

여러분 탕자 이야기도 잘 아실거에요?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아 객지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물 좋은 클럽에 가서 술도 마시고 좋은 차사서 이쁜 아가씨도 태워 다니고.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돈이 다 떨어지자 그 탕자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가 되었던 겁니다. 그에게는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참담한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었겠죠. 그러나 이 고난 덕분에 그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3) 성경에서 말하는 것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6-8)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고난을 겪게 된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아픔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거기에 아파하는 우리들을 사랑으로 안아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징계와 안아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방치해 두는 경우입니다. 그것만큼 무서운 심판은 없습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생명력 없는 삶, 의미 없는 삶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에게 지금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 깊고 성숙하게 해 주신다. 

죄의 현장으로부터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인격적으로 신뢰하면서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거죠. 

1) 창세기 12장 1절 말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고향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닫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인해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겐 이 말씀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으로 다가오겠죠. 로마서 12장 14장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4) 이 말씀이 갈굼 한번 안당하고 편하게 군 생활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갈굼을 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오기 전에는 이 말씀이 그냥 좋은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핍박을 당하고 저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이 말씀은 내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날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정말 힘든 거구나. 예수님의 사랑은 참 대단한 것이었구나. 예수 믿는 다는거 쉽게 봤는데 이거 쉬운 게 아니구나... 난 지금까지 값싼 은혜만 맛보고 있었지 정말 예수님을 따르면서, 내 십자가를 지면서 얻게 되는 부활의 은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 이렇게 난 부족한 크리스천이구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이 말씀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열심히 노력했지만 회사가 망한 사람, 누구보다 건강했지만 하루아침에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그냥 단순히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받은 이 말씀과 더불어,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지켜주셔야만 내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초청장 

이렇게 모든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과 가장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릴리 땅은 헬라 제국, 로마 제국,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등 모든 외세가 침범하는 길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동네북이었던 거죠. 갈릴리 사람들은 늘 침략과 약탈을 당했고,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역사가, 삶 자체가 고통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긴긴 고통으로 인해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 구세주를 갈급해 하는 마음이 고난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주님을 배척할 때에도 갈릴리 사람들은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 거의 모두가 다 갈릴리 사람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거죠. 

그런데 저는 갈릴리 지역에 대한 이런 해석을 보면서 갑자기 우리나라가 생각나더라고요. 우리나라도 얼마나 한 많은 민족입니까? 먼저 정복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을 만큼 온순한 민족,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역경과 고난 속을 겪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을 때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한의 정서가, 하나님 말씀을 받기에는 더 없이도 좋은 옥토였던 거죠. 갈릴리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의 기적적인 부흥 이면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그 민족 특유의 한의 정서가 깔려 있다. 이 한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부흥을 배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고난을 모르고서는 우리 조상들의 변화, 깊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참 맞는 말 같습니다. 

3) 이지선 자매 

여러분 이지선 자매에 대해 들어보셨죠? 그녀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온 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지금도 더 이상 예전의 곱던 얼굴을 찾아볼 수 없고 온몸에는 화상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놀랍게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제가 당한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때로는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삶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얼굴과 짧아진 손가락들, 치료실에서 보낸 수많은 낮과 밤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사고 나기 전 그 자리로 되돌려준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제 대담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입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시편 기자의 고백 

도 이지선 자매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시119:71-72) 이처럼 고난이야 말로 참으로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그 고난 중에서 더욱더 믿음이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도록 만드신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메시지를 전하셨는데 그중 핵심적인 메시지가 있는데, 바로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을 지키는 사람은 모든 계명을 지킨 것이다.”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죽기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그의 참 제자라면 우리는 당연히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고난이야 말로 이런 자기희생, 자기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서울 봉천동에는 ‘봉천동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윤주홍 장로님이신데, 봉천동이 빈민촌일 때부터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아이가 없고, 그분의 신세를 지지 않은 어른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이 장로님을 친부모형제처럼 따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1973년에 사랑하는 자식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아이를 친 택시기사가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뛰어든 병원이 바로 자신의 병원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사망 진단을 내린 아버지가 된 겁니다. 그 후 그 장로님은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신 것은 자신을 슬픔 속에 내버려 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말처럼, 단 한명의 자식을 잃고 수많은 자식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을 통해 그는 그처럼 아름다운 자기 확장을 이룬 것입니다. 

제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조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많이 잃었기 때문에 많이 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합니다. (영상) 

이지선 자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제가 직접 잃어보고 아파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아픔의 크기는... 결코 잃어버린 것들의 많고 적음이나 달라져버린 상황의 크고 작음에 비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활 상담이라는 분야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몸보다 더 무너져버렸을지 모르는 그 마음을 세상을 향해 다시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돕는 사람, 그 무너진 마음 곁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받은 위로와 평안으로 상한 영혼과 마음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지금 고난 받고 계십니까? 지금 그 고난이 여러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그 고난을 통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가난해 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아픔을 잘 압니다. 군대 가본 사람이 군대 가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런 저런 곳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유심히 보면 놀랍게도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했던 분들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일지,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공감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고난을 극복한 경험으로 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거죠. 고난은 그런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결론 

여러분 군 생활하기 어떠십니까? 할 만하십니까? 군 생활하기 힘드시죠? 만만한 시간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기 싫은 일 해야 되고, 밖에 있을 때는 눈치 한번 안 보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눈치가 생명이고, 보고 싶은 친구들도 못 만나고, 혹시 여자 친구가 떠나가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열심히 살아오고 있었는데 이 이상한 곳에 와서 맨날 삽질이나 하고 욕이나 먹고 하면서 내 값진 인생 낭비하는 건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들자나요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거 같습니다. 밖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중학교 때는 이유 모를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고등학교 때는 대학이나 취직을 위해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여자 친구에, 대학 학점에, 돈 버는 일에, 내가 목표로 하는 꿈에,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이나 컴퓨터 게임에, 신앙 단체 활동에... 많은 일들을 했을 겁니다.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본질을 놓쳐버렸습니다. 분주하긴 했는데,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그렇게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고 있는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지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런 질문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만 느껴집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정신없이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와 여러분이 이 군대라는 곳에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그 많은 것들에게서 단절 됐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그냥 단순한 외로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여기서 느끼는 고독감은 그냥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더라구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독... 분주함에서 떠나 조용히 나 자신과 대면하게 될 때, 그리고 삶이라는 수수깨끼 앞에 서게 될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혼자 고립된 것 같은 기분... 이 광야 같은 군대 안에서 하나님으로 밖에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을 경험하게 된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고난입니다. 두렵고 외롭고 하고 싶은 거 못하고 내 삶의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가까운 이들과 예전처럼 만나서 놀지도 못하고, 이쁜 여자 친구와 데이트도 할 수 없고... 하지만 이 고난 때문에 여러분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을 만드시고 여러분 각자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신 그분과 만날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마음 밭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외부와 전화할 수 있고 싸이를 하더라고 외부와 단절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군대라는 곳은, 여기서 겪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2년씩이나 말입니다. 

이 값진 시간동안 여러분... 지난 삶을 돌아보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변해야 할 것은 변하고, 하나님과 더욱더 깊게 만나고 그러면서 내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그 고독감을 피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도, 편지를 쓰고 읽어도, 운동을 하고 휴가를 나가도, 내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는 고민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더 잘 알겁니다. 이 군 생활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텅빈 공간을 하나님과 함께 채워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또 여러분이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군 생활은 축복입니다. 이 시간을 값지게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이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고된 시간을 통해 정금 같은 모습으로 전역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아프지 않으면'이라는 글로 나눔을 마치겟습니다. 
아프지 않으면을 군대가 아니면으로 바꿔서 읽어보세요!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뵈지 못할 거룩한 얼굴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 미우라 아야꼬 


2007.6.20 / 수요예배 설교 
설교문은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참고해서 만들었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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