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4년 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이맘 때,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냥 죽고 싶다" 그날따라 정말 울적해 보이셨던 아저씨는 스케치북에 천천히 이 한 마디를 한 자 한 자 쓰셨다. 오래 전부터 아저씨를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힘들어 하신 적이 많지는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나와 재홍이 준서 모두 그저 아무말 없이 흰 종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간호사는 몇 번이나 L-tube를 넣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 아저씨는 가라는 손짓을 하시며 다시 이렇게 쓰셨다. "아무것도 안 먹고 죽을란다"
그런 아저씨를 모시고 요양병원 밖으로 나왔다. 바닷가에 살면서도, 언제 바다를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며, 그래서 오늘이라도 좀 가보고 싶다던 아저씨의 지난 투정이 문득 생각나서였다. 창문을 내리면 올라가지 않고 올리면 내려가지 않는 그런 낡은 중고차에 아저씨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한지 10여분쯤 지났을까. 눈 앞에 바다가 보였다.
차에서 내려 후배들의 부축을 받으며 바닷가로 걸어가시는 아저씨의 뒷모습. 그곳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표정.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스케치북에 한 자 한 자 적으셨던 이야기들. 그 옆에서 흐르는 침을 닦고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두 후배 녀석들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 그리고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졌던 시원한 파도소리. 그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우리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또 다시 L-tube를 가지고 찾아온 간호사가 아저씨의 눈치를 봤다.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몇 번의 구역질 끝에 코줄을 끼셨다. 그리고 잠시 후 종이에 이렇게 쓰셨다. "정말 고맙다. 너희들 내가 절대 잊지 않는다."
얼마 전 포항을 방문했다. 그리고 성찬 아저씨를 찾아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날 꽉 껴 안으시는 아저씨를 보며 나도 겨우 눈물을 참았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 뵈서 죄송했고 내가 떠난 자리를 잘 채워주고 있는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
임상술기 시간에 L-tube 끼다가 눈물 콧물 다 뺐다며 그때 아저씨가 그렇게 보고 싶더라 이야기 하니 한참을 웃으셨다. 오랜만이지만 익숙한 아저씨의 필담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워서 잊을 수 없는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그 바다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2014. 10. 11
** 4년 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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