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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을 시작한 3월을 떠올리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동의서 받기다. 지금이야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아니까 넘어갈 부분은 넘어가고 중요한 것들만 강조해서 설명하고 사인을 받는데, 그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듬거리며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설명하다 보면 환자나 환자 보호자는 무슨 설명을 그렇게 길게 하냐는 표정으로 “네... 네...”

 

이렇게 기계적인 대답을 하였고, 주눅이 든 내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가곤 했다. 특히 내가 잘 모르는 내용에 대해 동의서를 받을 때, 가족들이 한데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를 에워싼 채 나만 바라보고 있을 때는 진땀이 났다. 그리고 동관 18층 VIP 환자들에게 동의서를 받을 때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져 문 앞을 괜히 서성이거나 병실에 들어갔다 다시 나온 적도 종종 있다. 마치 고백 편지를 든 채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 ‘어른아이’ 모습으로.

 

18층 VIP 환자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던 날이었다. 간이식 전 혈장교환술에 대한 동의서였는데, 여러 번 읽어도 잘 모르는 내용을 환자분에게 설명하려니 무척 긴장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기업 회장 느낌의 중년 아저씨가, 안경을 코 아래로 내려쓰고 컴퓨터를 하다가 고개를 돌려서 날 올려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동의서 받으러 오셨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도 자신감이 느껴졌다. 동의서 내용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질문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좀 전에 컴퓨터로 자신의 시술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셨던 것일까. 진땀을 흘려 가며, 모르는 건 최대한 잘 에둘러서, 그렇게 10분이 넘도록 설명을 했다. 내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성실하게 동의서를 받았던 적이 있었을까. 동의서에 사인을 마친 아저씨는 안경을 올려 쓰면서 내 고향을 묻더니 “공부를 참 잘했나 봐요. 이렇게 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부모님이 참 기뻐하시겠네요. 그렇죠?”라고 말했다. “네. 많이 좋아하세요. 제 실력보다 좋은 병원에 와서 감사하며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내 고향이 그 정도로 시골은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그다음 날이었다. 이 병원이라면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노부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위암 말기여서 완화 치료만 하고 계시던 분이었다. 점점 커 가는 위암이 상부위장관 어딘가를 막았고, 그곳을 넓히기 위한 스텐트 시술을 받고자 하는 동의서였다. 설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노부부가 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이해하기도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충대충 설명하고 사인을 받으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분이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뭐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이 뭐 알겠시유? 선생님들이 어지간히 잘 알아서 해 주시겄죠.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우리 영감 그 스땐뜨인가 그거 하면 나을 수 있는가요?”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첫째는 그 노부부가 겪을 힘겨운 시간이 눈에 보여서였고, 둘째는 어제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몇 분 걸리지도 않을 동의서를 10분 넘게 꼼꼼히 설명하며, 중간중간 이해했는지 되묻고, 미소까지 지어 보이던 내 모습을 말이다. 노부부는 내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 노부부가 18층에 있었다면 내가 과연 그렇게 설명을 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천천히, 알아듣기 쉽게, 그림까지 그려 가며 최대한 이해시켜 드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인턴인 내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문득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시 동의서 앞장으로 넘어가 노부부께 되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설명한 게 좀 어렵죠? 제가 말씀드린 거 이해하셨어요? 제가 쉽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릴까요?” 그러자 노부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설명했다. 노부부의 표정을 보면서, 천천히, 알아듣기 쉽게, 그림을 그려 가며. 그리고 시술 잘 될 거라고, 시술이 끝나면 지금처럼 배 아프고 토하는 증상들이 많이 좋아질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토닥여 드린 후 병실을 나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보면 나는 20대의 많은 시간을 아프고 가난하고 외롭고 배움이 어려운 사람들과 보냈다. 그러면서 다짐했었다. 나만큼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소통하려 노력하겠다고. 사람을 은연중에 차별하거나 같은 사람임에도 전혀 다른 태도로 대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인턴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에 따라 정성을 달리하며 대하는 날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겠다는 결심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난 이 마음을 지키고 싶다.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저항이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내가 이 약육강식 사회의 거센 물결을 따라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늘 정읍아산 응급실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VIP처럼 맞이해 보련다.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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