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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리클 때였다. 당시 실습 파트 교수님은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가"에 대한 화두를 가진 분이셨고, 우리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셨다.

 

교수님이 회진을 도실 땐, 마치 참의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기라도 하듯이, 환자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경청하고 손도 잡아주시며 병실을 훈훈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뒤따르는 우리를 한 번씩 돌아보시며 참의사 팁 같은 것들도 알려주셨다.

 

"제가 환자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죠? 환자에게는 히스토리가 가장 중요해요. 제대로 된 히스토리를 안 하면 불필요한 검사와 처치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포비아(phobia)를 치료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기본에 충실한 의사가 되세요"

이런 조언을 해주시는 교수님의 모습이 난 참 인상 깊고 좋았다. 하지만 그런 멋진 교수님이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2.

 

그 당시 병동에 며칠 째 쉬지 않고 딸꾹질을 하는 HIV 감염 환자가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니 환자는 초췌한 얼굴로 멍하게 앉아 있었고 보호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들이 계속 밥을 안 먹으려 한다고 말했다.

 

교수님께서는 몇 초간 생각에 잠긴 후 뭔가를 결심한 듯 보호자에게 잠깐만 나가 계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환자 옆에 앉아 잠시 또 침묵한 뒤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죽을 거예요?"
"네?"
"죽을 거냐고요"
"....."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이거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에요. 약 먹고 잘 관리하면 충분히 오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포기해 버릴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근데 왜 그렇게 밥도 안 먹고 곧 죽을 사람처럼 그래요.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
"나을 수 있어요. 내가 도와줄 테니 마음 다잡아요. 알겠어요?"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교수님은 같이 힘을 내보자며 환자를 따뜻하면서도 단호하게 설득했고 환자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광경을 보다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환자가 밥을 잘 먹지 않은 이유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밥만 먹으면 딸꾹질이 심해지고 구토가 나올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환자가 에이즈 진단을 받고 밥을 안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를 떠올렸던 것 같다. 환자-의사의 라뽀가 환자의 치료 의지를 회복시켜 해피앤딩을 만드는 뭐 그런 스토리 말이다. <패치 아담스>에서 "나는 할머니를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는 있어. 하지만 밥을 먹게 만들지는 못하겠어. 네가 도와줘."라는 룸메이트의 요청에 단번에 달려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처럼, 교수님은 열정적으로 그 환자와 마주하셨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핀트가 어긋난 게 분명해 보였다.  

회진이 끝나고 다시 환자를 찾아갔다.

"환자분 아까 좀 당황하셨죠?"
"아... 네..."
"근데 혹시 지금 식사 안 하시는 게 교수님이 말한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저도 당연히 밥 먹고 싶죠... 근데 밥 먹으면 계속 토할 거 같고 죽겠는데 어떻게 먹어요"
"그렇죠? 아까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너무 막 그러시니까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더라고요."
"허허허 교수님이 환자분 아끼는 맘에 그러신 거죠 뭐. 암튼 빨리 딸꾹질이 멈춰야 할 텐데.."

 

 

#3.


다음 날 교수님과 다시 그 환자를 만났다. 환자는 이제 (딸꾹질이 좀 괜찮아져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교수님은 기분이 좋으신지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환자는 날 잠깐잠깐씩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고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교수님은 병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에게 말했다.

"저 환자분 어제만 해도 밥 안 먹고 죽으려고 했어요. 그럴 때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그때는 환자의 마음을 만지는 것이 치료예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환자를 설득하고 이끌어가야 해요. 그리고 저 환자 입원하고 오늘 처음으로 웃었어요. 환자가 웃기 시작하면 치료는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의술은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아트예요 아트. 알겠어요?"

다 맞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열정과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때로는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걸 방해할 수도 있겠구나'

내게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환자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과는 다른 나만의 감동스토리를 써버리진 않았을까. 좋은 의사가 되려는 내 욕심이 내 눈을 가린 적은 없었을까. '환자'를 위하기보다 '환자를 위하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좋은 의사가 되려는 내 목표는 종종 그 이유와 대상을 잃어버리진 않았을까.

이제 한 주만 지나면 1년차가 된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고 환자들과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의사' '낭만닥터 정사부'가 되고 싶다. 지금 난 홈런을 치겠다는 마음에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타자 같은 모습이랄까, 헛스윙하기 딱 좋은 상태이다. 그러니 힘을 빼자. 그리고 '좋은 의사'가 되려는 그 욕심으로 내가 그리는 그 그림에 나 자신과 내가 마주하는 환자들을 끼워 넣지는 말자.

 

나는 내 모습 그대로. 환자도 그 모습 그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내게 주어진 것들에 온전히 집중하고 또 감사하며. 물 흐릇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첫 단추를 끼워보고 싶다.

 

2017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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